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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권 신공항_박근혜 회고록 2권,3장 정책

최재욱튜브 2024. 3. 11. 06:45

영남권 신공항

대통령이 되면 복잡한 이해관계로 뒤얽힌 사안을 조정하고, 이해 당사자들을 설득해 합의를 이끌어낼 일이 많다. 특히 대규모 국책 사업을 추진할 때면 지역 사회에 첨예
한 갈등이 벌어져 중간에서 곤란해진 경우도 허다했다. 이럴 때면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서라도 국익을 위해 과감한 결정을 내려야 했는데, 영남권 신공항 문제가 대표적
이었다.
나는 대선을 목전에 둔 2012년 11월 30일, 부산을 방문한 자리에서 신공항에 대해 "부산 가덕도가 최고 입지라면 당연히 가덕
도로 갈 것"이라며 "부산 시민이 바라는 공항은 반드시 건설하겠다는 약속을 드린
다"고 말했다.
영남권 신공항 공약은 어느 날 갑자기 불쑥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후보 시절 전문
가와 지역 관계자와의 논의를 거치면서 신공
항이 꼭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2026년이면 인천공항이 포화 상태가 돼 새 공항이 필요하다는 게 우리 전문가들의 분석이었다. 지역 균형발전 차원에서도 영남권 공항을 건설하는 것이 여러모로 국가에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다.
내가 신공항 건설을 공약하자 문재인 민주
당 후보가 11월 초 동남권 신공항을 재추진
하겠다고 밝힌 것에 대한 맞불 성격이라느
니, 2011년 4월 영남권 신공항을 백지화
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과 차별화에 나섰다는 등 온갖 정치적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국가
에 큰 영향을 미치는, 엄청난 재원이 투입되
는 국책 사업을 얄팍한 정치 논리에 따라 결정한다는 것은 나로 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형 국책 사업 특성상 치열한 경쟁과 갈등
이 따라 붙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신공항 건설 수요 조사에 착수했는데, 그 과정에서 부산·울산·경남· 대구·경북 5개 자치단체가 경쟁적으로 토론회를 열면서 기싸움을 벌였
다. 여당 내에서도 해당 지역구 의원들이 나뉘어 입씨름을 하면서 내분 양상이 벌어졌
다. 정기국회 개원일인 2014년 9월 1일 당시 새누리당 최 고위에서 김무성 대표가 "모든 것은 입지선정위에 맡겨야 한다"고 다독일 정도였다.
가만히 놔두면 공항을 건설하기도 전에 보수 진영이 전쟁터가 될 판이었다. 신공항 입지를 정할 때 공정성이 제대로 확보 되지 않으면 정말 큰일이 터지겠구나라는 걱정이 들었다. 갈등을 최소화하고 일을 깔끔하게 매듭짓기 위해서는 해외 전문가를 통해서,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국제적인 기준에 맞춰 입지를 선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2015년 6월 국토교통부가 꼼꼼한 검증을 거쳐 외국 전문기관인 파리공항공단엔지니 어링(ADPi)에 의뢰해 사전타당성 연구용역에 돌입했다.
2015년 11월 유일호 국토부 장관의 후임
으로 강호인 장관이 취임했는데, 나는 강 장관에게 입지 선정 전까지 보안을 확실히 지킬 것과, 어떤 형태로든 정부에서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강 장관은 이런 내 부탁을 끝까지 잘 지켜줬다. 5개 자치단체에서도 외국 기관에서 연구용역을 담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결정을 따르겠다고 합의했다. 당시 예민하게 날이 서 있었던 자치단체장들도 거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용역을 시작한 지 약 1년 뒤인 2016년 6월 21일, 밀양이나 가덕도가 아닌 김해공항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결정이 났다. 당시 ADPi의 연구용역 책임자인 장마리 슈발리에 수석연구 위원은 "가덕도와 밀양은 주변 환경, 비용 등 측면에서 공항 입지로 부적합하다"고 이유를 밝혔다.
나는 ADPi가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어떤 사전보고를 받거나 관여한 적이 없다. 발표 하루 전 강 장관이 조용히 청와대로 찾아와
서 ADPi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내게 보고
한 것이 전부다. 당시 보고를 받고 "새 공항
을 짓는 대신 기존 공항을 확장하는 방안이 가능하군요" 하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ADPi 발표 뒤 TK(대구·경북)와 부산, 울산 등에서 강력하게 반발했다. 서병수 부산시장
은 "지역 갈등을 피하려는 미봉책" 이라고 비판했고, 권영진 대구시장은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다"고 반응했다. 그런데 참 아이
러니하게도 당시 민주당에서는 "비교적 중립적인 결정"(김종인 비대위 대표)이라는 반응이, 정의당에서조차 "냉철하고 현명한 판단"(노회찬 전 의원)이라는 반응이 나왔
다. 당시 무슨 일만 터지면 날을 세웠던 야당에서 이런 반응이 나왔다는 것은 공정과 경제성을 중심으로 일을 추진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냐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만약 내가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쳤다면 김해신공항을 예정 대로 진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문재인 정부에서는 김해 신공항
을 문제삼았다. 2020년 4월 총선을 불과 네 달 앞둔 2019년 12월 김해신공항의 적절성
을 따지겠다며 검증위원회를 구성했고, 2020년 11월 17일 검증위는 김해신공항의 근본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냈다. 2021년 3월 9일 국무회의에서는 가덕도 신공항특별법이 통과되면서 결과적으로 김 해신공항이 폐기 수순으로 접어들었다. 성추문 의혹을 빚은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사퇴로 촉발된 부산시장 보궐선거를 한 달도 앞두지 않은 시점이라 논란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옥중에서 김해신공항 폐기 뉴스를 접하고 너무나 안타까웠다.
신공항 문제는 철저히 국익 차원에서 접근
했고, 공정성과 경제성을 우선순위로 둬서 추진했기 때문에 후회 없는 결정이었다. 이런 중차대한 사안이 선거철 포퓰리즘에 휘둘린다면 제대로 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까. 국익과 관련된 중요한 사안들은 절대로 정치 논리에 휩싸여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