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경과 국방부에 반박_서해일기 제3장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해경과 국방부에 반박
2020년 11월 2일
김홍희 해경청장을 만나러 인천 송도에 소재한 해양경찰청 에 갔다. 그들을 만나기 전 고민에 휩싸였다. 그들이 하는 이 야기들이 과연 진실일까? 차라리 면담을 거부할까? 고민 끝에 해양경찰청으로 갔고 2층 회의실에서 나와 해양경찰청장 단둘이 면담을 했다.
그때 김기윤 변호사와 김태균 해경 형사과장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김기윤 변호사가 김태균 과장에게 "조카가 자살이라도 하면 해경이 책임질 거냐?"라고 따졌다고 한다. 하지만 김태균 과장은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도 없고 반성하는 기색도 없이 당당히 서 있었다고 한다. 얼마 후 안에 있던 내가 동생의 빚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김기윤 변호사를 회의실로 불렀다. 김태균 과장도 따라 들어왔다. 그런데 김홍희 청장과 김태균 과장은 김기윤 변호사에게 회의실에서 나가라고 했고, 내가 변호사와 같이 면담을 하고 싶다고 하면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동생의 빚에 대한 수사 문제를 김태균 과장에게 말하자 김태균은 "무슨 수사를 잘못했다는 겁니까?" "회생법원에 연락을 해 봤습니까?"라며 짜증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김기윤 변호사가 "회생법원에 연락을 해 봤으면 고인의 빚이 탕감되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해경은 그런 식으로 발표를 합니까?"라고 반박하자, 김태균 과장은 회의실 바로 옆에 있는 형사과 사무실로 가버렸다. 당시 김태균은 나에게 수사와 관련해 따로 연락한다고 하였으나 아직까지 묵묵부답이다.
권력을 가졌다는 그들은 힘으로 나를 누르려 했다. 나는 혼자인데 그쪽은 여러 명이 나타났다. 김홍희, 김태균, 윤성현과 또 다른 한 명이 더 나왔다. 처음에는 김기윤 변호사도 못 들어오게 하여 언성이 높아지는 실랑이가 있었다. 결국 다 나가게 하고 김홍희와 나 단둘이 면담하게 됐다.
그날 김홍희 청장은 대준이가 바다를 잘 아는 항해사라서 월북했다고 주장했다. 너무도 기가 막혀 이렇게 외쳤다.
"나도 해기사 면허가 있습니다. 해기사, 항해사면 미쳤다고 '헤엄쳐 갑니까? 그냥 쉽게 고속단정 내려서 편하고 쉽게 갈 수 있는데"
김홍희 청장은 대한민국의 20만 해기사와 바다를 잘 아는 관련 종사자들을 예비 월북자나 잠재적 범죄자로 여기고 있었다. 그 논리라면 면허가 있는 김홍희 청장도 월북 대상자 인 것이다.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했다. 그들은 나를 무시하고 자극하려는 것 같았다. 약자를 철저히 무시하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우리가 이렇게 결정했으니 무조건 따르라며 명 령하는 그들의 행태에 절망했다. 그래서 이 면담이 오히려 나와 우리 가족에게 너무나 깊은 상처를 주었다.
항해사처럼 바다를 잘 아는 사람이 월북을 하려면 사전 준비물로 잠수용 슈트, 방한복, 오리발, 단순 부유물이 아닌 추진체 등을 준비할 것이다. 그런데 선박에서 그런 물건들을 가지고 있으면 금세 남의 눈에 띄게 마련이다. CCTV도 곳곳에 있고, 500밖에 안 되는 작은 '무궁화 10호'에 숨겨놓을 곳도 제대로 없다. 더구나 대준이는 '무궁화 10호'에 타기 시작한지 나흘밖에 안 되었다.
라이프자켓은 자동차의 안전벨트와도 같아서 배에 근무하는 사람은 누구나 입고 있어야 하는 장비였다. 라이프자켓을 입었기 때문에 월북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안전벨트를 매기 때문에 뺑소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라이프자켓을 입으면 물에 떠 있는 시간은 길어지지만 항해성은 현저히 떨어진다.
근무수칙상 근무 중에는 슬리퍼가 아닌 안전화를 신어야 한다. 슬리퍼는 개인적으로 침실에서만 신는 것이다. 만일 슬리퍼를 신었더라도 안전화는 따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안전화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대준이가 근무 중 슬리퍼를 신고 있다가 벗어놓고 갔다며 그걸 월북의 근거로 삼았다. 이는 국가가 공무원의 근무 수칙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다.
당시 동생은 아주 얇은 여름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그 곳 수온이 섭씨 21~23도밖에 안되니 바다에 빠지면 30분 이 내에 저체온증이 와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동생은 항해사인 데 그런 위험을 모를 리 없었다.
나는 방한복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발표하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해경이 공식적으로 선원 진술서를 내게 넘겨줄 때까지 기다렸다. 그 전에 말하면 내 말을 안 믿고 증거를 조작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선원 진술서를 확보하고 나서야 그 배에 남아 있던 동생의 방한복 사진을 공개했다.
동생의 해수부 공무원증을 가장 먼저 생각했다. 처음 선장에게 물어보니 동생의 공무원증도 배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북한은 계급 사회이고 선전 체제 국가인데 남한의 공무원이 그것도 해수부가 단속하던 그 해역을 통해 월북했다면 그걸 가지고 얼마나 선전을 해댔겠는가. 그런데 북한에서는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
해경에게 부유물에 대해 스티로폼인지 펜더인지, 모양은 둥근 것인지 네모난 것인지, 평평한 것인지 아닌지 정확히 밝힐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해경은 부유물에 대해서도 특정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배 옆에 매달린 노란색 완충물인 펜더라고 말했다. 펜더의 모양을 물었다. 해경은 나중에 길이 1.5m, 너비 90cm 정도의 부유물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추진체는 무엇이었는가? 무엇으로 노를 저어나간 것인가, 바가지인가, 주걱인가? 그들은 내 질문 그 어느 것에도 정확하게 답하지 못했다. 둥근 펜더는 마찰 저항 계수가 큰 물체이다. 구명조끼보다 직진성이 더 안 좋은 물체이다. 이것에 의존하여 북한 해역까지 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슬리퍼와 구명조끼 부유물에 대한 해경의 발표에 하나씩 나눠서 반박해가는 데 꼬박 두 달이 걸렸다. 내 반박에 더 이상 이길 수 없자 그들은 정신적 공황, 개인사, 부채, SI 첩보 등을 들고 나왔다.
해경이 조사하고 돌려보낸 동생의 물건들을 변호사와 함께 다시 뒤져봤다. USB, 회생 변호사로부터 받은 소장 등 자료가 될 만한 것을 다 찾아봤다. 우리가 파악한 동생의 부채는 9,500만 원이었다.
동생의 회생 담당이었던 변호사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선생님, 정말 이상하고 황당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뭐가요?"
"제가 수십 년 동안 회생 변호를 맡았는데 이대준 씨의 조건은 가장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연봉이 꽤 높은 공무원 이었고, 급여의 절반인 250만 원 정도는 생활비 쓰고 절반은 빚을 갚아도 2년 반이면 상환을 마칠 수 있는 정도 였습니다. 이건 꼭 알려드려야 될 것 같아서 전화드렸습 "니다."
거기에 제수씨도 맞벌이를 했기 때문에 빚을 갚고도 한 달 에 500만 원 정도는 생활비로 쓸 수 있는 형편이었다는 얘기다. 또 나를 비롯한 형제들이 동생의 경제적 어려움을 도와 줄 수 있는 의사도 있었고 여유도 있었다. 대준이가 빚을 갚을 의지가 없었다면 변호사에게 돈 줘가며 회생 절차를 신청 했겠는가. 우리나라 국민의 60%가 빚이 있는데 그들도 다 예비 월북자라는 말인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이혼한 상태였지만 신용 회복이 되면 동생 부부는 재결합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해경은 동생의 부채 액수를 엄청나게 부풀렸다. 심한 경우 8억 5,000만 원까지 얘기했다. 어떤 때는 3억 5,000 또 어떤 때는 3억 8,000 등 액수도 오락가락했다.
해경에서는 동생의 위치 추적을 하겠다며 내게 승인 동의를 구해왔다. 나도 궁금한 바였다. 어디서 발견되고, 몇 시에 휴대폰이 꺼졌는지 나도 궁금해서 두 번이나 승인을 해주었다. 동생의 휴대폰은 새벽 1시 53분에 꺼졌다. 그렇다면 최소한 새벽 1시 40분경부터 2시 사이에 대준이가 배에서 떨어졌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내가 실종 시간을 새벽 2시로 특 정하자 사건 한 달이 지나 해경도 슬그머니 실종 시간을 그 시간으로 바꿔놓았다.
중국 선박이 처음 동생을 구조한 후 여러 곳으로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대준이가 30시간 정도 NLL 이남에서 표류하는 동안 우리나라 해군과 해경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 시간 대준이가 있었을 만한 구역에서 수색했으니 목격했을 수도 있다. 그들은 그런 상황을 배제한 채 나의 반박이 두려워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만나더라도 '국가 안보 군사 기밀" "모릅니다. 없습니다."라는 말만으로 일관했다.
일반적인 해상 실종 사건은 동생의 사건처럼 복잡하지 않다. 대부분 단 한 번의 수사로 실종 처리되고, 해경 수사도 한 달 후에 종결된다. 그리고 그 사람은 1년 후 재판을 통해 실종에서 사망으로 판정받는다. 그걸로 끝이다. 물론 시신을 찾으면 그 전에 사망으로 처리된다. 실종을 인지하면 그날로 가족에게 연락하고 가족이 오면 장례식을 치를 건가 말건가. 해상에서 할 건가 일반 장례식장에서 할 건가를 논의한 다. 서로 보상 합의가 끝나면 사건도 그걸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유족이 도장 찍고 서명하고 난 후 원양선사에서는 해경에 보고만 하면 된다.
처음부터 해경에 이것은 여느 실종 사고나 다름없음을 강조했다. 북한 해역에서 죽임을 당한 것은 실종과 별개의 사 건이다. 일단 실종으로 종결하고, 그 후에 문제가 있으면 대공사건으로 바뀌니 그때 국정원이나 안보실, 검찰 등 제3의 기관에서 수사하면 된다고 여러 번 조언했다. 그럼에도 해경은 동생을 끝까지 월북자로 몰아가며 이렇게 일을 키웠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분석이 있었다. 문재인 대 통령의 유엔 화상 연설을 부각하기 위해서라는 주장도 있다.
새로운 남북관계를 열어보려고 하던 문재인 정부에서는 동생의 사건을 월북으로 몰면 남북관계가 급격히 나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북한군에 의한 '피격' 이나 '사실'보다는 '자진 월북'이 좀 더 남북관계의 급랭을 막고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본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이 죽었는데도 자신들의 정치쇼에 방해되지 않도록 사건을 조작하려고 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처음부터 해경이 총대를 메도록 하고 잘못되면 해경에 그 책임을 넘기려고 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대준이는 실족하여 바다에 빠진 것이다. 아무 리 경험 많은 전문가라 하더라도 사고가 나려면 어쩔 수 없다. 바다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배에서 담배나 휴대 폰이 바다 쪽으로 떨어지면 나도 모르게 물건을 잡으려고 그 쪽으로 손을 내밀게 된다.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잠이 부족해 정신이 몽롱해지는 새벽에는 위험 가능성이 더 크다.
예전에 내가 원양선사에 근무할 때 그런 식으로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된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너 왜 바다에 들어갔어?"라고 물어보면 그들은 황당한 대답을 하곤 했다.
"소변 보고 선실에 들어가려는데 바다가 부르더라고요. 그래서 들어갔어요."
이렇게 죽으려면 누가 바다에서 부른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해경은 그런 상황을 감안하지 않는 주장을 했다. 동생의 휴대폰은 12시 51분경에 꺼졌다고 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채로 대준이가 바다에 빠졌든가 휴대폰이 먼저 빠졌을 수도 있다. 컴퓨터 로그아웃 시간은 12시 47분경이라고 했다. 해경 주장대로라면 컴퓨터로 열심히 놀음하다가 로그아 웃까지 하고 '월북해야지'하고 바다에 들어갔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 월북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고, 실패하든 성공하든 온갖 비난을 받아야 하는 일이다. 동생의 성격으로 봐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과 하루 전에 나와 통화했을 때도 전혀 그런 조짐은 전혀 없었다.
11월 6일
북한의 통지문 때문인지 서울 국방부 장관이 나를 만나겠다고 하여 국방부로 찾아갔다. 그날 국방부에서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장관을 만나러 갔는데 국방부 면담장 입구 양쪽에 건장한 체격의 경호병 수십 명이 서 있었다. 나는 그때 기력이 몹시 약해진 상태였다. 그들과 싸움을 할 기력도, 장관을 공격할 힘도 없었다. 정신력 하나로 버티고 있을 때였다. 내가 간다고 경호병 수십 명을 배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묻고 싶었다. 누가 그런 광경을 연출했는 지도 궁금했다.
아무튼 나를 주눅들게 하려고 한 것 같은 장면에 화가 솟구쳤다. 그래서 면담 자리에 앉자마자 서욱 장관 면전에 대 놓고 한 마디 던졌다.
"국방부는 북한 4군단 예하 쫄따구 통신병에게 놀아난 한심한 집단입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깜짝 놀라며 "그런 걸 어떻게 아십니까?" 라고 물었다. "유튜브에 다 나와 있던대요."라고 대답하면서 기가 막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리에는 국방부 장관을 비롯해 합참 정보본부장, 해작사 작전2차장, 합참 정보관 등 여덟 명 정도가 있었다. 변호사도 참석 못하게 하여 혼자 갔는데 그들은 떼로 몰려나온 것이다. 다시 장관에게 물었다.
"왜 동생을 월북자로 몰았습니까? 시신이 불태워졌다는 첩보가 있다던데 형으로서 내가 들어봐야겠습니다. 비밀 유지 서약 각서를 쓰고서라도 들어야겠습니다."
"군사 기밀 사항으로 국가 안보 때문에 공개할 수 없습니다. 초기에 월북이라고 발표한 것은 언론에서 그리고 정보 유출자가 그렇게 해서 대응한 것입니다."
국방부 장관은 예상했던 대로 판에 박힌 답변을 내놓았다. 동석한 합참 정보본부장도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철벽을 친 것처럼 워낙 완강하여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SI 첩보를 듣고도 우리 군에서 아무런 구조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점, 국가가 마땅히 해야 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음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실종 보고가 들어왔으면 바로 국제상선통신망을 통해서 구조 매뉴얼대로 대응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응 매뉴얼이 없어 아무런 조치를 못했습니다."
장관은 어처구니없게 대답했다. 해군에, 해경에 해상 구조 매뉴얼이 없다니 이 무슨 엉터리 같은 소리인가. 해군은 기초 군사 훈련 때 인명 구조에 대한 교육도 받는다. 나도 해군 출신이라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리고 사경을 헤매는 국민을 구하는 데 무슨 복잡한 매뉴얼이 필요했을까? 그냥 달려가서 일단 구하면 되는 것 아니었을까? 북한의 해상 구역에 있었다면 국제상선통신망이나 우리 군의 채널 등을 통해 동 생의 안전과 인도를 요청하는 통신을 보내면 되지 않았을까?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인가? 그러나 국방부 관계자들은 주로 "모른다. 없었다."로 일관했다.
국회 국정감사 과정에서 북한군이 배로 동생을 끌고 다니던 장면이 나왔다고 해서 확인을 위해 해작사 작전2차장에게 물었다.
"배로 끌고 다녔던 장면이 있었다던데 얼마 정도 끌고 다 녔습니까?"
"4~5mile 정도입니다."
내게는 그 질문이 매우 중요했다. 배로 2시간 이상 끌고다녔으면 사람이 기진맥진해질 수밖에 없다. 북한군이 동생을 놓쳐서 다시 수색하는 장면이 있었다는데 동생은 이때 이미 심정지 사망을 했을 것이라고 내가 오히려 설명했다. 동생은 심정지나 익사로 이미 사망했고, 김정은에게 보고 후 심문할 가장 중요한 증거가 사라졌기에 통신병과 북한 함정은 자기 들에게 유리하게 역정보를 흘려 남한의 첩보를 교란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도 국방부는 그것이 대단한 고급 정보 랍시고 떠들어댔다. 그 잘못되고 성급한 발표와 보고로 엄청난 혼란이 야기되었으며, 과연 그 정보 분석이 정상이었는지 능력까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SI 첩보로 감청한 북측 보고에 따르면, 최초 발견 당시 동생은 "넓은 스티로폼 부유물 위에 엎어져 있었다. 그리고 한자가 적힌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고, 팔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라고 했다.
중국 배는 동생에게 왜 붕대까지 감아주고 구명조끼를 입혀 바다에 다시 빠트렸을까?
이에 대해 내가 설명했다. 우리나라와 북한에는 '입어권'이 있다. 입어권이 있는 중국 어선만이 북한이나 우리 어장에서 조업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어느 나라든 입어권을 받아 그 나라 어장에 들어가면 그 나라의 법령을 준수해야 한다. 그러니 불법 침입하여 잡혔을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추측컨대 입어권이 없는 중국 어선이 동생을 건져내 인도적 차원에서 상처를 치료한 후 구명조끼를 입혀 바다로 보내고, 어느 지점에 사람이 있다는 보고를 북한 함정에 한 것이다.
SI 첩보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그 내용을 국감에서 집요하게 추궁한 결과 감청된 SI 첩보라는 것은 동생의 목소리가 아니라 북한군끼리의 대화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것도 사건 당해 연도가 아닌 다음 해 2021년 국감에서 드러난 내용이다. 당시 첩보를 들었으면 왜 즉각 구조 조치에 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항변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것을 국가 안보 및 군사 기밀이라는 이유로 막아버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불안했던 이유는 정부 보존 자료의 존폐 기간이 지나면 그 자료들이 자동 폐기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이 문제를 수면 위로 올리고 공식화하려고 했다.
그날 국방부에 좌표를 요구했다. 대준이가 발견된 곳의 좌표, 피격됐다는 곳의 좌표를 내놓으라고 했다. 그에 대해 국방부가 유일하게 내놓은 자료는 '금동리 해안 일대에서 발생 된 사건'이라는 말뿐이었다. 이것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정보' 같지도 않은 정보였다. 해상 지도를 펼치면 금동리는 상당히 넓은 지역이다. 광활하다고 할 수도 있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지역 전체를 특정한 것이다. 그들과의 대화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11월 12일
국방부 장관과의 면담 자리에서 합참의장, 해작사 사령관, 2함대 사령관, 유엔사 사령관과의 면담을 잡아주겠다는 약속이 있었다. 국방부 정책기획과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장관 면담에서 다 말했으니 내부적으로 다 끝났다는 것이었다. 또 국방부 정보본부장도 한미 안보 공조의 이유로 답해줄 수 없으며, 유엔사 사령관의 면담을 자기는 모른다고 했다. 유엔사 는 국방부 관할이 아니라서 연락처를 인터넷으로 알아봐서 전화해서 미팅하든지 말든지 하라고 했다. 이건 유족에 대한 농락이었다. 왜 헛된 약속을 잡아놓고 사람을 기다리게 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11월 13일
해경은 내가 재청구한 '무궁화 10호' 직원들의 (9명) 진술조서 공개를 거부하는 비공개 결정통지서를 보내왔다. 거부 사유는 '수사가 진행 중인 사안으로, 수사 과정에서 취득한 비밀을 엄수해야 할 의무가 있다'였다. 이 진술조서는 해수부에서 이미 공개한 자료로, 엄수할 비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 유족들의 의사를 존중할 생각이 없고, 제대로 된 진상 규명 작업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인 것이다. 해경청장과 수사 라인 전체를 고소·고발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11월 17일
유엔 인권위원회는 문재인 정부가 2020년 10월 19~24일 까지 무엇을 했으며 유족들에 어떻게 했는지를 질의했다. 문재인 정부가 유엔에 보낸 답변서는 대부분 거짓말과 허위이다. 유엔 인권위원회를 상대로 문재인 정부가 국제적 차원에서 사기를 친 셈이다.
11월 18일
국방부 장관 면담 자리에서 요청했던 서면 질의 답변이 왔다. 군사 기밀 운운하며 공개를 거부하는 내용이었다. 장난치 듯 보낸 국방부 장관 답변에 대해서는 정확한 답변 나올 때 까지 재질의를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