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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7시간'의 황당했던 루머_박근혜 회고록 1줜,1장 정

최재욱튜브 2024. 3. 26. 19:00

'세월호 7시간'의 
황당했던 루머 

세월호 참사는 내 재임 중 벌어졌던 일들 가운데 가장 처참 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먼저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한 세 월호 침몰사고로 인해 단원고 학생을 비롯한 304명의 희생자 가 발생하고, 국민 여러분께 큰 상처를 남기게 된 점에 대해 이 회고록을 빌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이 참사에 대 해서는 당시 국정을 책임졌던 내가 누구보다 큰 비판을 받아 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랬기에 당시 세간에서 나와 관련해 제기됐던 온갖 의혹이나 추문에 대해서 일일이 해명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실이 아닌 것들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그게 또다시 사회를 분열시키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악순환이 발생 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 기회를 통해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 지를 소상히 밝히려고 한다. 
2014년 3월 말은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가장 바쁜 시기 중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작은 3월 20일에 열린 규제개혁 장관회의였다. 대통령이 되고 규제개혁을 여러 번 강조해 왔 기에 실질적인 성과를 내고 싶었던 나는 당시 회의에서 "물건 을 빼앗는 것만 도둑질이 아니라 일자리를 규제로 빼앗는 것 도도둑질"이라고 강조하며 혼신의 힘을 다했다. 현장 분위기 가 후끈 달아오르면서 회의가 무려 일곱 시간에 걸쳐 진행됐 다. 오후 2시 시작한 회의가 저녁도 거른 채 오후 9시에 끝났 을 때 나는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이틀 뒤엔 3월 24~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핵안 보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약 14시간의 비행을 거쳐 네덜란드에 도착했을 때 헤이그는 이미 밤이었 다.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한·중 정상회담을 위해 곧바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야 했다. 북한 핵 문제와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문제 등을 논의하는 중요 한 자리였다. 이어 열린 핵안보정상회의도 한국, 미국, 일본, 중 국 등 53개국 정상이 참석한 국제회의였다. 나는 24일 개막 세 션에서 기조연설을 맡았고, 다음 날에는 한·미·일 정상회담 이 열리는 등 강행군이 이어졌다. 한·미·일 정상회담은 몸이 너무 안 좋아 링거를 맞고서야 겨우 참석했는데, 아베 신조( 晋三) 일본 총리의 한국말 인사를 제대로 듣지 못해 오해를 받았을 정도였다. 헤이그 일정을 마친 뒤엔 3일간의 독일 순 방이 이어졌다. 
이렇게 5박 7일간의 빡빡한 순방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직 후엔 시차 적응까지 겹치며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었 다. 하지만 국내에서도 일정이 연일 이어졌다. 3월 31일부터 4박 5일 일정으로 재외공관장 회의가 열렸다. 각국에 파견된 외교관들이 참석하는 행사인데, 나는 4월 1일 청와대 영빈관 에서 열린 만찬을 주재했다.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이들을 앉 아서 맞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입구에 서서 한 명, 한 명인 사를 나누고 각 나라의 상황도 물어보다 보니 선 채로 1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8일에는 방한한 토니 애벗 호주 총리와 만나 한·호주 정상회담을 가졌고, 14일에는 21명의 대사에게 신임 장을 수여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을지 몰라도 실상은 몸 이 부서지는 듯했다. 
이런 나의 상태가 주변에 아슬아슬하게 비쳤던 모양이다. 하루는 정호성 비서관이 나에게 "대통령님, 차라리 하루만 일 정을 비우고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건의 했다. 사실 나도 '이러다가 큰일나겠다' 싶었던 차라서 그렇 게 하겠다"고 답했다. 무리하게 몸을 축내는 것보다 관저에 머 무르면서 업무를 보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관저라 고 해도 서재나 책상 등이 있어 충분히 업무가 가능한 환경이 다. 그렇게 해서 쉬기로 한 날이 바로 운명의 날인 4월 16일이 었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뒤 야당에선 내가 이날 왜 본관에 가 지 않고 관저에 머물렀는지를 놓고 여러 의혹을 제기했다. 나 중에 알아보니 정호성 비서관은 쉬기로 했던 4월 16일에 나의 연가 신청을 처리하지 않았다. 아마도 비공식적인 자체 휴일 정도로 간주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날을 공식 휴가로 생 

각했던 나와 혼선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날 무수히 벌어 진 혼선의 예고편이었다. 

강행군 뒤 관저서 휴식… 
첫 보고 7~8분 늦어 

4월 16일 오전은 당연히 공식 일정이 없었지만 일상은 평 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본관에는 가지 않는 대신 관저에서 그동안 처리하지 못했던 보고서 등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참 이었다. 
나중에 확인된 바로는 세월호가 기울어진다는 신고가 119 에 처음 접수된 것은 이날 오전 8시 54분이다. 김장수 안보실 장이 사고 발생을 인지한 것은 9시 30분, 상황보고서 초안을 받 고 나에게 직통전화를 걸었던 때가 오전 10시 12~13분이었다. 
이때까지 사고 사실을 모르고 있던 나는 보고서를 읽다가 참고할 자료를 찾느라 휴대전화를 놔둔 채 다른 방에 가 있었 다. 쉬는 날인 만큼 경계심이 다소 느슨해진 면도 있었다. 휴대전화를 그곳까지 들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다. 상황이 급박했기에 김 실장은 계속 통화를 시도하기보다 안보실 직원을 통해 상황보고서 1보를 바로 관저로 보냈다. 그 때가 오전 10시 20분이었다. 많은 이가 비판하듯이 이때 나에 게 첫 보고가 들어오는 데 약 7~8분이 늦어진 것이다. 
보고서를 받아본 나는 깜짝 놀랐다. 배 안에 수백 명이나 탑 승하고 있다고 하니 무엇보다 이들의 안전부터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곧바로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무엇보다 인 명피해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객실 곳곳을 다 찾아서 누락 인 원이 없도록 하세요"라고 지시했다(오전 10시 22분). 그래도 안 심이 되지 않아 바로 다시 전화를 걸어 "배 곳곳을 샅샅이 다 뒤져야 합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김석균 해양경찰청 장에게도 전화를 걸어 "해경특공대라도 투입해 여객선의 객 실과 엔진실까지 철저하게 확인해 단 한 명의 인명피해도 발 생하지 않도록 하세요"라고 주문했다(오전 10시 30분). 
이것이 세월호 사고 발생을 인지한 직후 청와대의 첫 대응 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해경이 현장에 도착했던 오 전 9시 30분쯤 세월호는 좌현으로 기울어져 복원력을 상실했고, 1시간 뒤에는 거의 침몰한 상태였다(오전 10시 30분). 
하지만 당시엔 아직 현장 화면이 확보되지 않았고, 침몰 사 실도 전달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구조 장비를 총동원하고 해경이 투입되면 승객들을 구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 다. 청와대의 대체적인 분위기도 그랬다. 이후 국가안보실을 통해 두 차례(오전 10시 40분, 11시 20분) 상황보고서가 도착했지 만, 배가 침몰했다거나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고하는 내용은 없었다. 

'전원 구조' 보도에 안도… 
확실히 안 따진 것 안이했다 

오전 11시쯤 관저에서 작은 탄성이 나왔다. 당시 YTN을 틀 어놓고 있었는데 '전원 구조'라는 보도가 나온 것이다. 나는 참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언론을 통해 상황을 파악했던 것이 이 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안보실은 해경을 비롯한 여러 기 관에서 올라온 보고들을 취합해서 가져오기 때문에 이런 급박 
한 사고 때는 오히려 보고가 언론 보도보다 늦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오전 11시 20분 안보실에서 보낸 세 번째 상황보고서 에 구조된 숫자가 예상보다 훨씬 적었을 때도 나는 다음 보고 에는 추가 구조 인원이 포함될 것으로 기대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때 언론 보도와 안보실에서 파악한 숫자 가 다른 이유를 더 따져 물었어야 했다. 나는 언론에서 그런 중 대한 일을 잘못 보도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고, 약간의 보고 지연이 생긴 것으로 짐작했다. 돌이켜보면 너무 안이한 판단이었다. 
야당과 일부 언론은 4월 16일 오전 10시부터 내가 중앙재 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를 방문한 오후 5시까지를 '잃어버린 7시간', 또는 '세월호 7시간'이라고 명명하며 의혹을 제기하 곤 했다. 혹자는 이날 내가 굿을 했다고 했고, 어떤 이는 호텔 에서 정윤회 씨와 밀회 중이었다고 했다. 또 '성형 시술을 받았 다' '프로포폴을 투여했다' 등의 이야기도 떠돌았다. 나중에 재 판에서도 다뤄졌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는 날조에 불과한 내용 이다. 
나는 세월호 구조가 진전이 없었다는 것이 확인된 오후부터 매시간 상황을 보고받으면서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전원 구조'가 적힌 보고서를 기대하고 있을 무렵 인 오후 1시 7분 안보실에서 '370명 구조'라고 적힌 새로운 보 고서를 올렸다. 6분 뒤 김장수 안보실장도 유선으로 “190명을 추가 구조해서 현재 370명 구조입니다"라고 재차 보고했다. 많은 인원을 구조해 반가웠지만, 여전히 '전원 구조'라는 언론 보도와는 수치가 달랐다. 그래서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언 론보도와는 차이가 있는데, 구조 상황을 다시 확인해서 정확 하게 보고해 주세요"라고 지시했다(오후 2시 11분). 
초조하게 기다리던 다음 보고가 들어온 것은 오후 2시 50분 이었다. "죄송합니다. 190명을 추가로 구조했다는 것은 중복 보고입니다. 잘못된 보고입니다"라는 안보실장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 나는 2시 57분에 안보실장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왜 구조인원 집 계가 이렇게 혼선을 빚는 겁니까. 철저히 파악하세요"라고 질 책한 뒤, 한시라도 빨리 중대본으로 가서 직접 확인해야겠다 고 생각했다(오후 3시). 
급할수록 냉정해져야 하는데, 사안이 사안인 만큼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최대한 빨리 중대본으로 가자고 지시했지만, 경호실에서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조금 기다려주십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이동 때문에 교통 통제를 해야 하니 경 찰청과도 협의해야 하고, 중대본에도 연락해야 하니 시간이 조금 걸린다는 것이다. 사실 대통령이 어딘가를 가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알 겠다"고 답한 뒤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미용사가 왔다는 연 락이 왔다. '호출한 적이 없는데, 미용사가 왔다니?'라는 생각 이 들었는데, 청와대 관저 직원이 나의 외출 준비를 위해 미용 사에게 급히 와달라는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내가 서두르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모양이다. 
경호실에서는 연락이 없는 상태였고, 긴장한 미용사는 "제 가 빨리 하면 금방 됩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미 여기까지 온 그 녀를 돌려보내기도 난처한 상황이었다. 결국 경호실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머리 손질을 맡기기로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 면 가장 후회스러운 순간 중 하나다. 이때 경호실에서 준비할 시간을 기다려 달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일단 출발하세요" 라고 말하면서 밀어붙였어야 했다. 
물론 내가 이때 조금 더 일찍 중대본에 갔다고 해서 구조에 큰 영향을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국가지도자가 대책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국민에게 그런 모습을 빨리 보여주지 못하고 이날 정부가 우왕좌왕하는 것처 럼 비친 것이 못내 아쉬운 것이다. 

경호 문제 때문에 중대본 방문 늦어져… 
후회스럽다 

오후 3시 30분에는 정무수석실로부터 '구조 인원 166명, 사 망 2명'이라는 서면 보고가 왔다.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 다. 문제는 이때까지도 경호실에서 연락이 없었다는 점이다. "왜 이렇게 준비가 늦어지는 거죠?"라고 독촉했더니, 중대본 앞에 무단 주차한 차량 때문에 안으로 진입하기가 어려운 상 황인데, 차주가 확인되지 않아 이동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속이 타들어 갈 것 같았다. 물론 경호실은 경호실의 입 장이 있다. 2022년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불행한 사고도 있었지만, 경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데서 문제가 불거지기 때문에 '만에 하나'라는 여지도 두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백날 잘해도 한 번의 작은 실수로 모든 것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상황을 고려하면 일단 중대본 근처까지 차로 이동한 뒤 도보로 이동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나도 당시에 마음 이 급해서인지 차분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애태우기만 했던 것 이다. 이날은 한 번 잘못 채워진 단추처럼 계속해서 뭔가 어긋 났다. 결국 경호실에서 중대본 방문 준비가 완료됐다고 보고 가 들어온 것은 오후 4시 30분, 내가 중대본에 도착한 것은 오 후 5시 15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