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소미아,
대통령으로서 마지막 결단
내가 대통령에 취임할 무렵 한국의 미래를 위해 임기 중에 반드시 실현하겠다고 작심한 사안이 몇 가지가 있었는데, 한· 일 간의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General Security of Military Information Agreement, 지소미아)이 그중 하나였다.
2016년 3월 31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일 3국 정상회의는 북한의 4차 핵실험(2016년 1월 6일)이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여서 분위기가 무거웠다. 북핵을 억제하기 위해 세 나 라가 어떻게 조율하고 공조할 것이냐에 초점이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
“北도발 억지에 필수"
지소미아 팔 걷어붙인 오바마
이날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 억지를 위해서는 한·미·일 3국 간에 긴밀한 안보 협력이 필수”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한·일 지소미아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이었다. 사실 미국 측이 한·일 양국의 지소미아를 권한 것은 당시가 처음은 아니었다. 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미국 측에선 이런 저런 채널을 통해 이를 권유했다. 일본도 한·일 지소피아를 원했지만 보다 적극적인 것은 미국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미국과 일본은 이미 지소미아를 맺은 상태 였다. 미국도 동아시아 안보
와 관련해서는 일본의 정보기술에 많이 의존했다. 일본이 가진 장비는 군사정보 위성 8개, 1000km 밖의 탄도미사일을 탐지할 수 있는 레이더를 탑재한 이지스함 6척, 탐지거리 1000km 이상 지상 레이더 4기, 공중조기경보기 17대 등이었는데, 이를 통해 파악한 정보 중에서는 북한 핵 미사일, 잠수함 동향 등 우리 안보와 직결되는 것이 많았다. 미국 입장에서는 이것을 한국에 빨리 알려줘서 공동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문제는 지소미아를 체결한 양국 간 공유 정보는 제3자 제공이 금지된다는 점이었다.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발사 등 북한의 도발 위협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한·일 지소미아는 분명 필요했다. 1980년대에는 역으로 노태 우 정부가 일본에 요청했지만 일본이 거부한 적도 있었다. 물론 우리만 일방적으로 수혜
를 입는 게 아니다. 남북 일본인의 동향 등에 관심이 많은 일본은 우리 정부의 휴민트(인적 네트워크)가 습득한 정보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한·일 지소미아는 위안부 합의만큼이나 정치적 부담이 큰 이슈였다.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일본과의 군사협력은 거론하기 힘든 금기였다. 앞서 이명박 정부도 국익을 앞세워 속전속결로 한·일 지소미아를 추진하다가 여론의 거센 반발에 부닥치며 뜻을 접어야 했다. 나는 무리하게 지소미아를 강행하기보다는 2014년 한·미·일 정보공유약정(TISA)을 체결해 지소미아를 대체하는 쪽을 택했다. 한국과 일본이 제공하는 정보를 미국이 상대방에게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하지만 일본 측은 "한국을 믿고 정보를 제공하려면 협정으로 격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 했고, 미국도 "매번 한국에 이 정보를 줘도 되는지 일본에 허락을 받아야 하고, 그 외에도 복잡한 절차가 많다"며 고도화되는 북한 도발에 신속히 대처하기 위해서는 한·일 간 지소미아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나도 한·일 지소미아가 필요하다는 점은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이 문제를 신중히 다뤄야 했다. 야당이 국회 동의를 요구하며 협정에 반대하고, 일본과의 직접적
인 군사협력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국민 여론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2015년 위안부 협상을 놓고 야당 측의 반발이 거센 마당에 지소미아 문제를 그냥 밀어 붙일 수는 없고, 국민들과 공감대를 넓히는 과정이 필요했다.
한·미·일 3국 정상회의 후 미국과 일본 측의 지소미아 요청에 대한 우리 입장을 묻는 기자들에게 청와대는 “과거 이명박 정부에서 추진하다 중단된 경위가 있다. 협정을 체결하려면 환경 조성이 먼저 필요하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라고 답했다. 이런 기조는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순방 중 터진 北5차 핵실험...
지소미아 방아쇠 당겼다
그러나 이런 흐름이 바뀌게 된 결정적 시점은 라오스 순방 중이던 2016년 9월 9일이
다. 이날 오후 1시 30분 북한이 전격적으로 5차 핵실험을 감행한 것이다. 나는 라오스 수도 비엔 티안에서 이 소식을 듣자마자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했다. 돌아오는 전용기 안에서 여러 가지 상념에 잠겼다. 나는 취임 후 북한에 대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제안하며 핵을 포기하면 공동 번영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수차례 보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핵실험뿐이었다. 거기에 잠수함 탄도미사일 등 북한 도발은 점점 고도화되고 있었다. 앞선 김정일 시대 18년보다 김정은 집권 이후 도발 횟수가 더 많았다. 북한 관련 군사정보를 신속히 파악하고 주변국과 교환해야 할 일이 증가 할 텐데 한·일 지소미아 문제를 더는 미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와대에 돌아와서 참모진과 논의한 뒤 나는 한민구 국방부 장관에게 한·일 지소미아를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말하면 북한의 5차 핵실험 때문에 충동적인 결정을 내린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실 한·일 지소미아는 그동안 오랜 기간에 걸쳐 관련 전문가들과 참모진이 많이 연구하고 의논해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결론은 내려진 상태였다. 다만 시기가 문제였을 따름이다.
국방부는 2016년 10월 27일 한·일 지소미아 추진 사실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예상했던 대로 야당과 시민단체의 반대가 거셌다. 일본군의 침공을 허용했다는 식의 험한 얘기들이 쏟아졌다. 그 무렵 소위 '최순실 사태'까지 터져 정국이 극도로 혼란
스러워졌다. 안 그래도 추진하기 쉽지 않은 사안인데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11월엔 국회에서 야당을 중심으로 나에 대한 탄핵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국회에서 탄핵의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와중 에도 나는 지소미아를 챙기기 위해 수시로 외교부의 보고를 받고 일본과의 협의 진행 과정을 계속 체크했다. 누가 보면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가뜩이나 코너에 몰려 있는 대통령이 인기 없는 정책을 추진하니 말이다. 당시 나도 한·일 지소미아를 처리하는 게 나에게 아무런 정치적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일일수록 해야 할 때를 놓치면 그 모멘텀을 되찾기 힘든 법이다.
국회 탄핵 표결이 어떻게 결론날지 모르겠지만 만약 탄핵된다면 그때는 정말로 이 일을 못하게 될 것 아닌가. 이럴 때일수록 내가 책임지고 처리해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졌다. 오히려 지금 정치적 유불리를 의식해 이것을 해놓지 않는다면 나중에 굉장히 후회할 것 같았다. 대통령이 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어서 대통령이 된 것인데, 대통령이 유불리를 따지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또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이 후엔 누구도 이것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결국 한·일 지소미아 협정이 2016년 11월 23일 체결됐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국회에서 탄핵안이 통과(12월 9일)됐다. 극도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지소미아를 해내고 물러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한·일 지소미아는 한국의 안보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해내야 하는 과제였다. 그래서 이후에 옥중에서 고초를 겪으면서도 한·일 지소미아를 떠올리면 안도감 내지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지소미아를 처리하지 못했다면 옥 중에서 계속 그 문제를 걱정했을 것이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통령이란 위치는 그런 자리다.
尹-기시다의 지소미아 정상화,
늦었지만 다행
과거에 아버지께서 큰 결단을 내리실 수밖에 없는 굵직굵직 한 일이 많았다. 포항제철 설립, 경부고속도로 건설, 월남 파병 등이다. 당시에도 어마어마한 반대에 부닥쳤는데 이를 무릅쓰고 추진했다.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반대 측을 설득하는 노력도 했지만, 그것이 항상 통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일본이 관련된 사안은 반일감정이 자리하고 있어서 마냥 여론만 따를 순 없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일 국교 정상화 문제였다.
당시 내가 듣기로 10만 명이 반대 시위를 하며 청와대로 오려고 했다. 아버지는 대통령에 오른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당시 정치적 부담을 따지면 한·일 국교정상화 추진은 정치인으로서 명백히 손해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아버지는 정치적 손실을 기꺼이 감수하고 한·일 국교정상화를 추진했다. 국익을 위해서였다. 1965년 당시 한국의 1인당 GDP가 105달러였다. 당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은 돈을 빌려줬다.
가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큰 나라였다. 그런 나라를 누가 믿고 차관을 주겠는가. 결국 관계 정상화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빌려올 수 있었고, 그것으로 경제 발전의 인프라를 닦았다. 돌이켜보면 그때 아버지가 정치적 부담을 꺼려 한·일 국교정상 화를 안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정치를 시작할 때부터 내 마음 속에는 늘 그런 질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한·일 지소미아를 포기했더라면 지금까지도 엄청나게 자책하고 있었을 것 같다.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파기한 데 이어 2019 년 8월 22일 지소미아마저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안타까움과 함께 큰 우려가 생겼다. 석 달 뒤인 11월 22일 지소미아를 조건부 연장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지만 이미 양국의 신뢰는 무너진 뒤였다. 국가 간의 협정을 이렇게 자꾸 뒤집으면 국제적으로 한국의 신뢰도가 깎이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한·일 간 정보 라인이 끊기면 고도화 하는 북한 핵무기에 대응하는 데 당연히 빈틈이 커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여야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고 해도 국가 안보에 필수적인 정보자산까지 포기한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2023년 3월 16일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지소미아를 정상화하 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늦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의 생명과 직결될 수 있는 국가안보 문제가 더는 우리 내부의 정치적 논리에 따라 휘둘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